[에세이] 만화에서 그림은 무엇일까

2020-10-21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 여기서 잘은 정확한 인체 데생(Dessin)과 입체감의 표현, 캐릭터의 표정, 그리고 여러 작가가 다년간 개발해낸 기교를 뜻한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너의 만화에서 그림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나만의 정리된 철학을 설명할 수는 있다. 이건 정답이 아닌 나만의 답이다. 이 글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조촐한 나의 연구정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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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사람이 그림을 왜 그렸는지를 고민해봤다. 문자 이전부터 존재하는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 곧바로 알 수 있어야 했고 그것이 장점이었다. 가축을 그렸으면 가축을 인지하고 사람을 그렸으면 사람을 인지하도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의 가장 기본은 직관성(immediacy)이었다. 물론 수많은 세월이 지나 18세기 말부터 직관성을 떠난 추상성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예술문화가 형성되었지만 적어도 초기의 그림과 지금의 만화에서는 무엇을 그렸던지 상대가 정확히 이해할 때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직관에는 한가지 필수요소가 있는데 그건 우리가 모두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이데아(Idea)'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과'라고 쓰는 과일을 미국에선 'Apple'이라고 쓰고 프랑스에선 'Pomme'라고 쓴다. 만약 우리 언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한글로 사과를 써서 보여주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직관성이 생기지 않아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과를 그려서 보여주면 어떨까. 거기서 색칠까지 했다면. 미국, 프랑스, 일본, 중국 그 어느 나라의 사람이라도 그것을 자신들의 언어와 경험 속 형태를 떠올리며 직관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이 사과라는 과일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과를 그린 그림을 보여주면 떠올릴 수 있는 형태가 각자의 머릿속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은 바로 이런 직관성을 부여할 수 있다. 만화에서도 어떤 물체, 생명, 장소를 그렸을 때 다 함께 떠올리거나 유추해 볼 수 있는 형태가 모두의 머릿속에 존재해야 하며 그림을 보는 순간 직관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만화에서 피사체를 그려낼 때 처음 고민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직관성이다. 그리고 그 인식 위에 각자의 개성에 맞게 캐릭터의 표정, 장소의 표현, 대사, 앵글의 변화, 컷의 크기와 간격 등으로 생명력을 부여하고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면 된다. 이 부분은 개개인의 경험과 경륜, 경지, 실력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내가 무어라 말할 수도 없고 그럴 위치나 급도 안됨을 분명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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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직관성을 의식하며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할까. 내가 정리한 답은 약속된 정형으로 겉 선을 그려내고 그 안을 부정형을 띄는 작가만의 개성으로 채우면 단련 여하에 따라 매력적인 그림과 사서의 부여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똑같은 사과를 놓고 그려도 프랭크 밀러(Frank Miller)가 그렸을 때, 팀 버튼(Tim Burton)이 그렸을 때, 피터 정(Peter Kunsik Chung)이 그렸을 때 모두 다르다. 그들이 열심히만 그려준다면 각자의 개성을 채워 넣어 얼마나 멋진 그림들을 그려낼지 상상만 해도 설레는데 중요한 것은 보는 독자들이 이 그림들을 보며 정형화된 사과라는 것을 떠올리면서도 그 안에서 펼쳐진 각자의 개성을 보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과인지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면 서사를 가지는 만화에서는 극을 이끌어 나가기 매우 어렵다. 정리하자면 만화 속 그림은 작가의 개성을 찾고 발전시켜 나감이 맞지만, 형태를 그려내는 선들은 독자들이 인식할 수 있는 정형적인 방향으로, 반대로 그 안을 채우는 선들은 비정형성을 띠어야 한다. 그러면 매번 그림 속 사과를 똑같은 사과라고 인식하면서도 매번 다른 그림을 보는 재미와 매력, 그리고 더 나아가 작품 속 시간과 서사를 독자들이 인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만화에서 그림은 직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위에 이런 정형과 비정형의 어우러짐이 서사를 이끌게 만드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보았고 이것은 음악 활동 중 특히 작곡을 공부해보면서 깨닫게 된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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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음악을 처음 하고 싶어 할 때는 들었을 때 떠오르는 영감의 자유로움 만큼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함으로 시작하지만 직접 곡을 만들기 시작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우리가 듣는 모든 음악이 박자와 코드(화음)라는 정형성과 익숙한 진행방식이라는 틀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의 반복, 혹은 1, 2번의 변화 속에 자유로울 수 있는 비정형은 바로 멜로디 라인과 약간의 비트가 어쩌면 전부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데 그때부턴 곡을 만드는 것이 어려워진다. 여기서 보컬의 매력이나 연주자들의 실력, 레코딩의 기술력, 프로듀싱의 실력 등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것은 앞서 설명했던 경험과 경륜, 경지, 실력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단지 그 앞 단계까지의 음악을 심플하게 놓고 보면 위와 같이 박자와 코드라는 정형 속에 멜로디라는 비정형이 시간의 흐름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악은 이런 일정한 틀 속에 담기지 않으면 우리의 귀에 하나의 음악(Music)으로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소리(Sound)로 들려올 뿐. 이 점을 깨닫고 나서 만화에서의 그림을 고민해 보았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이 음악을 인식하듯, 캐릭터와 장소를 인식하고 서사를 부여 할 수 있는 시간을 이해하려면 우선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정형성과 통일성을 띄어서 일정한 규칙을 가져야 독자들에게 인식의 틀을 선사할 수 있고 그 안에 작가의 개성일 담을 비정형스러운 선들이 매 그림을 수놓는다면 우린 만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동력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 위에 개개인의 경험과 경륜, 경지, 실력 등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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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